메뉴 메뉴
닫기
검색
 

여론

제 733 호 [교수칼럼] 좀비와 독서

  • 작성일 2024-05-16
  • 좋아요 Like 0
  • 조회수 194
정소영

좀비와 독서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괴물이 있다.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고대에는 귀신이나 악령, 괴수가 대표적인 괴물이었다. 근대가 되면 흡혈귀나 골렘, 하이드와 같이 인격을 가진 괴물이 등장한다. 그것들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사이의 경계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이었다. 21세기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인상적인 괴물은 좀비이다. 좀비 영화의 원형으로 꼽히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는 무덤에서 살아난 시체들이었다. 

  좀비는 군중과 대중사회의 공포를 표현하는 괴물이다. 그들이 자주 나타나는 공간은 쇼핑센터나 광장, 대규모 술집이나 학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좀비가 퍼지는 이유인 바이러스 감염이나 타액 전염 역시 대중사회의 접촉 공포와 연관된다. 그들은 웬만한 상처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짐승처럼 신음 소리를 내지만 말은 하지 못한다. 고통을 느끼는 감각과 언어중추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좀비는 주체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고 오직 습관과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좀비는 미디어가 지배하는 정보사회의 인간을 상징하는 괴물이기도 하다. 정보와 지식의 양이 늘면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누가 생산했는지 어떤 의도로 유통되는지 모르는 정보를 따라다닐 뿐 그 정보의 진위를 따지려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댓글을 달거나 남의 글 퍼 옮기는 쉬운 일에 익숙해져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힘들어한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접한다고 착각하지만, 대부분은 알고리즘이 제시하는 편향되고 제한된 콘텐츠를 소비할 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상투적으로 반복하는 사람 역시 현실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좀비이다.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예루살렘 재판을 지켜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현대의 악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고, 자기 언어로 말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줄 모르는 평범한 사람 안에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그녀는 관료주의나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 사는 인간은 쉽게 아이히만 같은 악인이 될 수 있고 말한다. 미디어가 지배하는 사회 속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투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일상에서 우리는 “왜 그렇지? 과연 그런가? 가치 있는 일인가?”를 계속 물어야 한다. 그래야만 남들의 사고에 지배당하는 상투성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절한 질문을 위해서는 정보와 지식을 종합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질문한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록 질문의 답이 남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 상투적인 생각과 주체적인 사고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제 긴 ‘빌드업(Build-up)’을 마치고 결론을 말할 때다. 상투적인 인간이 되지 않는 방법, 생각을 키우고 질문을 배우는 방법에는 독서만 한 것이 없다. 책을 읽지 않는 인간은 독서하는 인간에 비해 좀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빌 게이츠는 자신에게 하버드 졸업장보다 더 소중한 것은 독서하는 습관이었다고 말한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만나고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주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수단도 독서이다. 이런 이해와 사고에 기초할 때 창의력과 상상력도 나온다. 자기의 생각을 완전한 문장으로 몇 분 이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일 것이다. 기계로 찍어낸 듯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독서는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치트키’이다. 

  물론 어떤 책을 읽느냐도 중요하다. 좌절감만 주는 자기계발서나 부자들의 자서전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지는 않다. 대학생이라면 실용서보다는 교양서를 읽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인문과학책, 사회를 분석한 사회과학책, 과학을 쉽게 풀어쓴 교양 과학책 그리고 문학책을 우선 읽는 것이 좋다. 비록 책상에 앉아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독서는 매우 능동적인 활동이다. 의지가 필요한 노동이기도 하다. 정보사회에서 그저 그런 정보를 소비하는 좀비 같은 대중이 되고 싶지 않다면 당장 책을 들어야 한다. 성공을 위해서든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든 우리에게 독서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다.